BRIGHT SIDE

Fashion + Culture + Style

  • 2025. 3. 5.

    by. brightsider

    목차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서양 여성복식, 특히 무도회복은 그 시대 여성의 신체적 모습과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 시기는 패션이 단순한 의복을 넘어 신분과 가치, 그리고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맥락에서 당시 유행하던 여성복의 특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19세기 중반에서 후반, 특히 빅토리아 시대에 접어들면서 여성의 패션은 매우 복잡하고 장식적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무도회복은 부와 지위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대개는 역삼각형의 실루엣을 강조했습니다. 여성의 몸은 착용하는 의복에 따라 극적으로 변형되었으며, 이는 점차 신체를 압박하는 의복 구조가 되었습니다.
       

      신체 압박 의복의 출현 배경

      여성복은 당대의 사회적 규범과 가치관을 반영했습니다. 여성들은 결혼과 출산을 전제로 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이상적인 미적 기준에 맞추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기준은 여성의 몸을 가각 구분 짓고, 특정한 형태로 압박하는 의복을 요구했습니다. 코르셋이 그러한 관습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무도회복은 그 위에 얹혀지는 추가적인 장식과 구조로 완성되었습니다. 

      당시 유럽 여성들에게는 풍성하게 퍼진 화려하고 장식적인 드레스가 유행이었습니다. 이런 옷들은 여성들을 높은 신분의 고귀한 모습으로 보이게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의 몸을 기괴한 S라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가 되기도 했습니다. 화려하게 아름다운 이면에는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최대한 앞으로 나오게 한 가슴, 엉덩이를 강조하기 위해 지나치게 허리를 조여 가늘게 만듦으로서 납작한 배와 균형을 이루게 하는 등 극단적인 여성성에 대한 추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도회복의 디자인

      무도회복은 당시의 여성복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장식적인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주로 사교계의 무도회에서 유행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말의 무도회복이라면, 길고 곧게 양식화된 꽃 장식, 화려한 색상으로 수높은 가장자리(특히 위로 향하도록 함) 장식들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화려한 장식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장식에 대한 열정은 당대 가장 특징적인 여성 복식의 요소이지 않을까 합니다. 자수, 아플리케, 레이스, 시퀸, 프릴, 플리츠 등 반짝거리고 하늘하늘한 장식들로 19세기 서양 여성의 복식은 화려함과 여성성을 극대화 하는 디자인이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 이런 무도회복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하였습니다:

      스케르트(Skirt): 대개 여러 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드라마틱한 실루엣을 생성했습니다. 패치워크와 자수, 레이스와 같은 장식이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스케르트의 하단은 흔히 넓고 부풀린 형태로 디자인되어 여성의 허리를 더욱 강조했습니다.

      코르셋(Corset): 여성의 허리를 압박하여 탁월한 곡선을 만들어내는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코르셋은 철제로 되어 있거나 고무 메쉬로 제작되었으며, 착용자의 허리를 최대 20인치까지 줄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압박은 여성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디자인 기법: 드레스의 구조와 디자인에서는 당시 장인들이 고급 원단과 기술력을 활용하여 세련되고 복잡한 형태를 만들어냈습니다. 카톨릭식 장식과 리본, 레이스가 함께 조화를 이루며, 각양각색의 색감이 무도회복을 더욱 화려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당시 드레스는 엉덩이를 감싸면서 부챗살 모양으로 드리워진 스커트, 트레인이 있는 옷자락, 아주 좁고 길게 늘어진 소매, 극도로 높이 세운 스탠드 칼라 등의 디자인이 유행이었습니다. 여기에 잘 손질된 헤어스타일까지 합쳐져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는데요. 커다란 주름을 넣은 시폰과 실크, 벨벳이나 레이스 등으로 만든 모자 아래에 핀으로 고정시키면서 말아올린 물결치는 머릿결 등을 만들었습니다.

      의상의 상징성과 의미

      무도회복은 단순한 옷차림을 넘어서 그 자체로 사회적 상징성을 지녔습니다. 이들은 재력과 품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사회적 지위의 상징으로 작용했습니다. 또한, 여성의 생리학적 특성과 관련된 규범을 반영하여 여성을 특정한 정체성에 가두는 역할도 했습니다. 이러한 의복은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을 동시에 형성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관능적인 이미지와 여성성에 대한 이상

       당시 예술과 패션계에서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한 영감(Inspiration)의 또 다른 근원이라면, 여성의 관능적인 이미지와 여성미에 대한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풍성하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은 빈 분리파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미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와 함께 패션계에서도 풍성하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어서 핀으로 고정하는 헤어스타일이 인기였습니다. 빈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는 이처럼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은 극도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으로 둘러싸인 성모 마리아와 같은 여성의 모습을 작품으로 그렸습니다. 그의 초상화 속 여성들은 일상의 모습을 넘어서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술과 삶이 상징적으로 결합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빈 분리파: 1997년 구스타프 클림트를 주축으로 낡고 판에 박힌 사상에 의존하지 않고 미술과 삶의 상호 교류를 통하여 인간의 내면적인 의미를 미술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결성되었음

       
      사실 1900년 경, 여성의 신체는 장식의 대상이거나 보석 등의 장식품으로 치장하려는 대상으로서 취급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옷을 만드는 의류업계는 돈벌기와 이익 추구만을 바랬고, 여성 인체의 생물학적 기능과 건강성은 무시한 채, 단지 여성의 신체를 에로틱하게 보여줄 수 있는 스타일의 의상을 만들고 판매하는 데에만 신경 썼다고 할 수 있었어요. 이렇듯 패션에 당시 여성성에 대한 인식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19세기 말부터 이미 몇몇 디자이너들은 여성 패션에서 비대칭 구성이라는 새로운 미적 원리를 수립하고자 하는 시도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패션은 사회 계층 간의 불균형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을 드러내는 매개체였기 때문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메다 프리마베시]
      구스타프 클림트 [메다 프리마베시]

       

      의상개혁운동과의 연관성

       이러한 압박감과 신체 변형, 불균형과 불평등의 관행은 후에 의상개혁운동을 촉발하는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당시의 여성들이 건강을 해치는 코르셋과 불편한 의복에서 벗어나고자 하며, 스스로의 신체와 권리를 찾고자 했습니다. 이에 따라 새로운 디자인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으며, 기능성과 편안함이 강조되는 현대 패션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서양 여성 무도회복은 그 시대의 신체 관념과 사회적 역할을 반영한 중요한 패션 아이코닉이었습니다. 이러한 의상은 단일한 형태가 아닌 다양한 스타일과 기법을 통해 여성의 신체를 압박하고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압박은 결국 건강 문제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며, 의상개혁운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